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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2008

3/19/2010 Camino de Santiago 2010

비행기 안이다.
필리에서 마드리드에 가는 중이다. 아.... 가기 전까지 정말 정신 하나도 없었다. 모든 걸 잘 마무리하고 떠나면 좋았을텐데 정말 나에겐 '끈기'라는게 전혀 없는 건지 마지막 날에 제대로 망해버렸다. 그것만 생각하면 정말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여행하는 도중에는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기 직전 만감이 교차했었다. 랩탑을 가져가야하나 Portu에 가서 숙제한담에 랩탑을 산티아고우체국으로 부쳐야 하나, 돌아올 때 머무를 마드리드 호텔에 미리 가서 맡겨놔야하나. 아니면 여행을 포기해야하나. 그렇게 되면 경욱언니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와.... 정말 다시는 이런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다. 나도 모르게 게을러진 댓가를 아주 톡톡히 치른 것 같다. 

33일 걸었던 카미노, 이번엔 4일이나 5일 밖에 걷지 못할 생각을 하니 이번 여행이 장난 같이만 느껴진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이번 카미노에서 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시간 조차 없었기에 이번엔 무엇을 얻을지 정말.... 아 나도 모르겠다. 너무 섣불리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같다. 2년 전처럼 내 진로를 알고 싶은 desperate한 감정도 거의 없다. 2년 전엔 내가 삶이 뭔지, 나는 누군지 알고자 하는 갈망이 무척 컸기 때문에 그만큼 배우고 성장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무언가 느낄 수 있을까? 과연?

인생을 게임에 비유하자면, 나는 2년 전 카미노를 통해 stage3을 깼고 지금은 stage4에서 입구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 꼭 stage3에 가서 했던 게임을 다시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적어도 이 순간은 그런 생각이 든다. 막상 포르투에 가서 순례자여권을 받고 조개를 가방에 달고, 화살표를 만나면 이런 느낌이 없어질까?

그래도 좋은 건 2년 전 그 시간들이 다시 새록새록 기억이 나면서 행복해지는 듯한 기분 때문일거다. 

신부님이 너무 보고싶다. 그 때를 회상해보면 정말 기적같은 만남이었고 기적같은 인연이었다. 지금은 연락이 잘 되지 않지만 난 믿는다. 언젠가는 꼭 다시 뵐 수 있을거라고. 그런데 가끔은 궁금해진다. 이게 대체 어떤 감정일까? 내 삶에서 가장 큰 정신적 turning point였던 카미노에서의 시간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더 심적으로 attached 된 걸까? 아니면 뭘까.

아.. 갑자기 이번 겨울방학 끝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오두막(The Shack)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주인공은 납치살해로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을 잃고 3년을 죄책감에 힘들어하는데 어느 날 딸이 살해당했던, 그 흔적이 아직도 있는 오두막으로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서 가게 된다. 그곳에서 흑인의 모습을 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만나게 되고 '용서'를 배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내 줄거리 설명이 정말 허접하지만 아무튼 그런 내용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비행기에서 읽으면서 (엄마와 막 헤어져서 그런지) 중학교 때 읽은 '가시고기' 이후로 눈물이 앞을 가려서 차마 책장을 한번에 넘기지 못하고 덮었다 폈다를 반복, 결국 12시간에 걸쳐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서야 느끼는 건데, 길에서 만난 신부님, 33일 동안 뵜던 신부님이 나에겐 그 주인공이 만난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얘기는 들으시면서도 정작 신부님 자신에 대한 얘기는 별로 안하셨고 (신부님 연세를 카미노 끝나기 1주일 전에야 알았으니!! 그것도 미사를 마치고 이탈리안 순례자가 물어봐서 대답하시는 걸 엿들어서 알아낸 것이다), 조용하시면서 은근 웃기시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원미언니, 나, 그리고 신부님 이렇게 다녔는데, 왜 우리는 헤어지고 싶어도 자꾸 마주치는거냐고 푸념을 늘어놓으면 "셋 다 이름에 '우'가 껴서 그래요" 이러시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가 내 이름엔 '소'가 있고 신부님은 성함이 이 우 갑 이시니 '우'자가 들어가 있고 원미언니는 소띠라서 그렇게 자꾸 마주친다는.... 아 정말 황당해서 2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길가다가 3개월째 카미노에 있는 지친 한국인 순례자분들이 미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그자리에서 자리펴고 미사드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여하튼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나한테 해주고 싶으셨던 말씀을 신부님 행동과 입을 통해 하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두막에서 주인공 앞에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나에겐 목사님이 아닌 신부님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신게 아닐까. 물론 끼워맞추기 식의 논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아무쪼록 이번 여행.. 사고 없이 별 탈 없이 또 다른 무언가 (사람, 추억, 휴식 등등..)를  얻어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