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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2008

2008년 6월 4일 (Ledigos-> El Burgo Ranero)

항상 별 일이 있어도 오늘은 평범하게 지나가는구나 했는데, 오늘도 역시나 별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보통 알람소리보다는 주변침대에서 먼저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저절로 깨곤 하는데, 다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나도 늦게 일어났다. 이왕 늦은 김에 그 숙소의 bar에 눌러 앉아 집에 전화도 하고 colacao(코코아)와 크로아상을 먹고 원미언니와 느긋하게 사하군까지 14km 가량 걸어갓고 그곳에서 한참 전에 도착한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도 정말 신기했던게 보통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길이 아닌 길로 돌아서 걸어가는 중이었기에 신부님을 만나리라 상상도 못하고 있었는데 광장에 있는 레스토랑의 바깥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발을 살피는 신부님을 보고는 우리는 정말 인연인가보다 하고 원미언니랑 얘기했었다. 그렇게 셋이 또 앉아 점심으로 menu peregrino를 로즈와인과 함께 먹었다. 배를 채운 후 언니와 신부님은 몸상태를 봐서 사하군에 머무르겠다고 했고, 나는 10km를 더 걸어가서 자겠다고 하며 혼자 길을 떠났다. 그 때가 세시였다.

혼자 7km 가량 걸으면서는 화살표도 잘 보이지가 않아서 잘 가는 건지 아닌건지 갸우뚱하며, 도마뱀도 가끔 보며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 때는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보통 이른 오후쯤에 순례자들이 짐을 풀기 때문에 이 마을의 알베르게가 다 꽉차면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만일 좀 더 비싼 호스탈에 묵어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고생을 더 했을 때 당당히 돈을 더 내고 묵을 수 있게 다음마을까지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마을로 들어섰다. 하지만..ㅠㅠ 정말 숙소가 다 꽉 차버렸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알베르게 앞에 앉아있던 영국엑센트를 가진 아저씨가 지금 storm이 오는 것 같다고 자기같으면 알베르게 맨바닥에 자던 호스탈에 가던 이 마을에 남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 속으로 다짐한 것이 있었고 여기에 그냥 남자니 나중에 해보지 않은 걸 후회할 것 같았다.

"I'd better get going."
"Oh.. okay. What's your name? Okay, Soyae, good luck!"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서 나눈 우리 대화는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자와 배웅하는 자의 그것처럼 비장했다.


그렇게 멋있게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난 나였지만 막상 가려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마을을 나서자마자 비바람이 드세지는 모양이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지켜달라고 기도하며 우비를 둘러쓰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주위를 둘러봐도 떠난 마을조차 보이지 않았고 사람도 없었다.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그 때 어떤 경운기가 저 길 앞쪽에서 다가왔다.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던 경운기는 멈추더니 그 안의 아저씨가 나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순간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겠다던 내 신념은 온데간데 없이 "아싸, 아저씨가 태워주는구나~" 하며 얼른 폴짝 올라탔다. 아... 탄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그 아저씨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건지를 못알아듣겠는 것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서로의 언어로만 얘기를 하다가 결국 Adios를 외치고 경운기에서 하차했다..

경운기를 떠나보내고 한참을 걸어가니 다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경운기아저씨와 손짓발짓으로 대화하려 노력하는 중에 처음같은 두려움은 덜어졌던 것 같다. 그렇게 10분 쯤 걷는데 길 저쪽 끝에서 믿기지 않는 광경이 보였다. 흐린 안개 속에서 어떤 구름 떼거리와 사람 형체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눈을 씻고 보니 양 떼와 한 목자가 개 세마리의 호위 속에서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나는 실로 예수님이 살아서 내게 오시려는 줄 알았다.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으러...

내 쪽에 다가왔을 때 카메라를 얼른 집어 든 나를 보고 목자는 포즈를 잡아주었다. 내가 자기를 예수님으로 착각했었던걸 알았나보다. 서로 인사를 하고 제 갈 길을 가는 목자와 양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난 듯한 기분..

나는 계속 걸었고 그렇게 해서 7.8km떨어져 있는 마을을 약 두시간 만에 도착했다. 운좋게도 그 마을 전체를 통틀어 딱 하나 남은 침대를 내가 차지할 수 있었다. 호스피탈레라(알베르게의 여주인)이 어찌나 고맙던지 꼭 껴안고 뽀뽀해주고픈 심정이었다.

이리하여 2008년 6월 8일, 사하군에서부터 17km를 더 걸어 총 30km를 걸었다.
항상 생각하지만 카미노에서는 하루하루가 정말 내게 큰 의미로 남겨지는 것 같다. 특히 오늘은 하나님의 존재가 온몸으로 온맘으로 느껴졌던 날이었다.

아침에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

문에 그려진 대빵 큰 화살표

Sahagun의 성당 앞에 세워진 순례자상. 한국에서 읽은 김효선씨의 책에서 본 동상, 나도 찍어봤다.

우리가 Sahagun에서 마셨던 로즈와인과 신부님 ㅋㅋ

혼자 걸은 길

자전거 가족. 아빠는 딸이탄 유모차를 끌고 엄마는 아들과 함께 2인 자전거를 탔다

급흐려지는 날씨..이후에는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카메라를 꺼낼 수도 없었다.

경운기와 이별한 후..

멀리서 다가오는 목자



착한 목자아저씨




도착해서 정말 기뻤던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