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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밤송이


"처음에 나는 밤송이 하나를 받아 들고 그것이 인생이라 여기며 쩔쩔매고 있었던 것 같다. 손바닥뿐 아니라 온몸을 찔러 대는 그것을 버릴 수도, 감싸 쥘 수도 없었다. 겨우겨우 밤송이를 까고 그 안의 것을 꺼내 들었을 때는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산다는 게 밤송이 같을 수가 있는가. 그때는 진갈색으로 빛나는 밤톨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삶이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에 진갈색 껍질을 벗겨 보았을 것이다. 그 안에는 연갈색 융단 같은 보늬가 있었고 그때는 또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밤알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中
by 김형경

낙타에게서 빌린 책의 서문에 있는 글인데 왠지 공감이 갔다. 휴학할 때 사는 이유가 뭔지, 공부는 왜 해야하는지 알고 싶다고 배낭 짊어매고 스페인도 갔다 왔었고,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이렇게 다시 이타카의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이따금씩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랑 그때의 나는 뭐가 다를까. 다만 그 시간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이라고는 지금 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밤송이가 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정도. 내가 보는 한 사람의 모습도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내가 생각하는 삶..또는 세상도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

사람은 정말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네 장래희망은 뭐니?'라고 물을 때 말하는 그런 단어들...엄마, 의사, 과학자, 또는 화가..이러한 것들을 야무지게 제 꿈이라 말하고는 했지만 그 단어들 하나하나가 정말 다른 '삶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요즘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친구들이나 선배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더 자주 드나보다. 가끔 나는 친구랑 밥먹을 곳을 정할 때 "아 뭘먹어야 잘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하고 우스갯 소리를 하는데, 앞날에 대한 문제를 두고도 이 말을 해야 할 듯 싶다.

나는 아직도 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보는 세상은 지극히 표면적인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엇이 세상을 살아가는 정석이고, 올바른 길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에 주눅이 들어 '난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가 하면 오래된 친구가 대학이 잘 풀리지 않아서 여태까지 방황하는 것을 보며 어느 순간에 연민의 눈빛으로 그 친구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 반성하기도 한다. 한 가지 일을 해도 한쪽에서는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이 세상에 정석이란 것이 존재할까. 옳고 그름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그런데 위 책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만큼 살면서 터득한 것이 하나 있다면 어떤 실수든 시행착오든 저질러 놓고 보는게 낫다는 것 뿐이다." 우리 엄마 세대인 이 작가분도 이렇게 말하는데.. 이제 겨우 스물두살 된 내가 어떻게 산다는 것을 알까. 결국은 '정석은 없다'가 정석일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